2019년 11월 6일 수요일

6년차 조사원의 고백 "2016년 총선 때 여론조작"[중앙일보]

6년차 조사원의 고백 "2016년 총선 때 여론조작"


“다른 곳보다 두 배 많은 보수를 주는 것부터 수상했어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습니다. 여론조사가 아니라 여론조작을 하라고 시키더군요.”

여론조사 경력 6년 차 조사원인 김성진(41·여, 가명) 씨는 2016년 총선 때 한 중소 여론조사업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참여했다 황당한 일을 겪었다. 외부엔 RDD(Random Digit Dialing: 기계가 생성하는 무작위 번호로 전화 걸기)를 활용한 조사인 것처럼 속이고, 실제론 업체에서 미리 확보해 둔 명부를 활용해 여론조사를 하라는 요구였다.

당시 본인을 슈퍼바이저(관리인)라고 소개한 30대 남성은 김 씨에게 “이른 시일 안에 정확한 여론을 알아보기 위해 불가피한 방법을 쓰게 됐다”며 “문제가 생길 일도 없지만, 문제가 생겨도 내가 다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김씨가 슈퍼바이저에게 건네받은 파일엔 경기도 A 시 거주자 3000명의 휴대전화번호를 비롯한 개인정보가 빼곡히 담겨 있었다. 그 중엔 붉은색으로 따로 표기한 ‘우선 조사대상’도 있었다. 심지어 슈퍼바이저는 김 씨에게 “DB가 있으니 출근하지 않고 집이나 원하는 장소에서 따로 조사한 뒤 결과만 정리해서 줘도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 씨는 나중에 문제가 될 것 같아 결국 조사 도중에 일을 그만두고 나왔다.

김 씨는 “이 업체가 특정 후보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조작하려고 이런 꼼수를 썼던 것 아니겠냐”며 “그 전까진 실시간 감청을 통해 조사 과정 자체를 모니터링 하는 대형업체에서만 일했기 때문에 이렇게 엉터리 조사를 하는 곳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여론조사는 사실상 ‘감시 없는 권력’이다. 공적 영역에서의 영향력이 갈수록 막강해지고 있지만 이를 견제·감시하는 장치는 턱없이 부족하다. 조사원 선발‧교육부터 조사를 진행하는 방식과 결과 추출까지 모든 과정이 ‘깜깜이’로 진행된다. 민간 업체라는 특성 때문이다.

‘김영란법’의 적용대상도 아니다. 조사 결과의 왜곡을 청탁하는 외부의 유혹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구조다. 한 여론조사 업체의 고위 간부는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결과를 부풀리거나 특정 방향으로 여론을 왜곡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업체의 도의적 책임만 믿고 여론조사가 공정할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많은 업체에서 한 달에 수십 건의 저품질 여론조사가 쏟아진다”고 말했다.

이용구 중앙대 응용통계학과 명예교수는 “각종 정치‧사회 관련 조사에서 왜곡‧조작 현상이 발생하고 있지만 아무런 통제 장치가 없다”며 “조사업체들은 그 영향력에 합당한 엄격한 법적‧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선거철 ‘떴다방’ 조사업체, 부실·왜곡조사의 온상


특히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어 여론조사의 공정성은 더욱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선거철엔 지역구별로 여론조사 수요가 급증하는 데다, 여야 정당들이 ‘여론조사 공천’을 광범위하게 실시하기 때문에 여론조사 업체들이 대목을 맞는다.

선거철만 되면 ‘떴다방’처럼 신생 조사 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가 선거만 끝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건 여의도의 흔한 풍경이다. 그러나 이들 신생 업체들은 대부분 저가의 ARS 조사를 시행하는 데다 표본추출 과정이 엄밀하지 않아 조사의 신뢰도가 낮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자유한국당 관계자는 “2014년 지방선거 때 3000만원을 주기로 하고 여러 번 여론조사를 의뢰했는데 투표 전날까지 내가 크게 우세한 것으로 나와 방심했다가 결국 졌다”며 “화가 나서 잔금을 주지 않았는데 업체가 아무 말도 못 하더라”고 말했다.

여론조사, 어떻게 활용되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여론조사, 어떻게 활용되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여론조사가 민주주의의 공식 절차로 편입된 여론조사 경선은 다른 나라에선 유례가 드문 한국적 현상이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 여론조사가 활용된 이래 여론조사는 공천 시즌마다 전가의 보도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여론조사 경선이 과연 민주주의 원리에 맞냐는 논란은 끊이질 않는다. 민주당 관계자는 “여론조사는 연령·성별 등 가중치를 반영하기 때문에 1인이 1표의 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상대당 지지자가 일부러 약체 후보를 선택하는 ‘역선택’ 논란도 벌어질 수 있다. 특히 여론조사의 특성상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오차범위를 무시하는 것도 문제다.

가령 2014년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의 오산시장 경선에선 1위 후보가 40.90%를 얻어 2위 후보(40.65%)를 고작 0.25%포인트 차이로 제쳐 논란이 됐다. 오차범위 이내의 격차는 우월을 논할 수 없다는 게 통계학의 기본이다. 하지만 각 정당은 행정적 편의를 위해 조금이라도 숫자가 높은 후보의 승리를 인정한다. 그러다 보니 여론조사 경선이 벌어지면 조금이라도 지지율을 높이려고 탈법 행위를 시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대법원, 여론조사 경선 공식 투표로 인정…총선 앞두고 파장


이와 관련해 최근 대법원이 여론조사 경선을 공식 투표로 인정하는 판단을 내려 여의도에 파문이 일고 있다. 대법원 형사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지난달 31일 선거 후보자가 여론조사에 부정하게 개입한 경우 이는 공직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놨다. 지난해 6‧13 지방선거 때 자유한국당 대구시장 후보 경선에서 불법 여론조사를 주도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이재만 전 한국당 최고위원 사건에서다.

이 전 최고위원은 당시 경선을 앞두고 특별보좌단과 지인, 친인척을 동원해 1147대의 유선전화를 개설, 휴대폰 하나로 착신 전환하고 이를 통해 여론조사를 조작한 혐의다.

이후 진행된 재판에서 쟁점은 여론조사를 방해한 행위를 선거 투표 방해 범죄로 처벌할 수 있는지였다. 2심 재판부는 “무작위로 건 전화 여론조사에 응답한 것은 투표권이 있는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뒤집었다.

대법원은 투표를 ‘후보자에 대한 선택의 의사표시’로 규정하고 여론조사 경선도 투표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암암리에 이뤄지던 착신전환 등 여론조사 조작에 대해선 업무방해 혐의만 적용됐지만, 앞으론 선거법 위반 혐의가 적용돼 보다 엄중한 처벌이 이뤄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론조사도 투표? 1, 2, 3심 재판부 논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여론조사도 투표? 1, 2, 3심 재판부 논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미 더불어민주당은 21대 총선(2020년 4월 15일) 당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 룰로 일반 국민 여론조사(안심번호) 50%에 권리당원 투표 50%를 더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자유한국당 경선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여론조사가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대법원이 여론조사 경선을 투표행위로 인정한 만큼 여론조사 경선 결과를 놓고 후보자 간 여론조사 왜곡 시비가 격화될 소지가 커졌다”고 전망했다.

이렇듯 높아진 여론조사의 위상에 비해 내부 검증 또는 모니터링 시스템은 허술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조사업체 임원은 “업계 상위권에 있는 업체들은 그나마 내부 검증팀이 있지만, 비용의 한계 때문에 철저히 검증할 수 없다”며 “가령 응답자가 1번이라고 답했는데 조사원이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3번으로 마킹해도 내부에서 걸러내기 힘들다”고 털어놨다.

불법조사 걸려 처벌받아도 1년 뒤에 재개업 가능


조사원의 전문성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현재 조사원에 대한 교육·관리는 100% 업체 몫이다. 업체가 아무런 사전교육 없이 조사원을 선발해 조사 업무를 맡겨도 이를 제재할 수단이 없다.

조사원 경력 4년 차인 박주희(37) 씨는 “조사원 업무를 처음 시작할 때 ‘질문지를 그대로 읽고 답변을 정확하게 기재해야 한다’는 언급 외에 특별한 교육을 받은 적 없다”며 “특별한 자격이나 능력이 필요치 않기 때문에 진입장벽 자체가 없고 이런 탓에 부업으로 조사원 일을 하거나 전업주부가 아르바이트 형태로 업체 의뢰를 받아 조사를 시행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관계자는 “조사원 선발은 민간업체인 여론조사 업체의 경영과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에 여심위 차원에서 개입할 여지가 없다”며 “조사원에 대한 교육 역시 업체가 자율적으로 시행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들의 전문성을 직접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출처: 중앙일보] 6년차 조사원의 고백 "2016년 총선 때 여론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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